쇄빙선! 얼음의 나라로 가는 길, 한국이 두 번째 배를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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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경남 거제의 한화오션 사업장에서는 조용하지만 의미심장한 착공식이 하나 열렸습니다. 이름하여 ‘차세대 쇄빙연구선’.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이 배 한 척이 앞으로 10년 한국의 극지 과학은 물론 조선·해운 산업 지형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배가 왜 이렇게 주목받는지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배길래?
일단 숫자로 먼저 감을 잡아보죠.
- 총톤수 약 1만 6,560톤 — 기존 아라온호(7,507톤)의 두 배 이상
- 3노트로 항해하며 두께 1.5m의 얼음을 깨는 능력 — 아라온호 대비 약 50% 향상
- 영하 45도의 혹한에서도 운항 가능 — 아라온호는 영하 35도가 한계였습니다
- 승선 인원 100명(승무원·연구원 합산), 무보급 항해 75일 이상
양방향으로 얼음을 깨는 기능까지 갖춰 극지 기동성이 크게 좋아졌고, LNG와 저유황유를 함께 쓰는 이중연료 시스템으로 친환경성도 챙겼습니다. 이 배가 투입되면 지금까지 북위 80도 부근에 머물러 있던 한국의 북극 연구 반경이 북극점 근처까지 넓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왜 굳이 ‘두 번째’ 배가 필요했나
한국의 극지 연구는 2009년 취항한 아라온호에서 시작됐습니다. 남극과 북극을 오가며 해빙, 기후, 생태계 데이터를 모아온 고마운 배지만, 문제는 단 한 척뿐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남극 연구와 북극 연구 일정을 서로 나눠 쓸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연간 탐사 가능 일수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건조가 시작된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이 갈증을 해소해 줄 두 번째 카드입니다. 해양수산부가 사업을 이끌고 있고, 2029년 완공과 시험 항해를 거쳐 2030년 정식 취항이 목표입니다. 취항 이후에는 아라온호와 역할을 분담해 남극과 북극을 각각 전담하게 될 전망입니다.

결국 핵심은 ‘북극항로’입니다
사실 이 프로젝트가 단순한 연구선 한 척 추가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북극항로’라는 더 큰 그림 때문입니다. 정부는 북극항로 개척을 주요 국정과제로 삼고 있고, 최근에는 부산에서 출발해 북동항로를 거쳐 유럽까지 가는 시범 운항도 실제로 이뤄졌습니다. 이 항로는 수에즈운하를 도는 기존 항로보다 거리가 약 7,000km나 짧습니다. 물류 업계 입장에서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죠.
조선업이 웃는 이유
북극항로가 실제로 열리려면 극한 환경을 버티는 내빙·쇄빙 선박이 필요합니다. 쇄빙 LNG운반선, 내빙 컨테이너선, 유조선 같은 특수 선박 발주가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죠. 마침 국내 조선 3사는 이미 관련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삼성중공업은 러시아 야말 LNG 프로젝트에서 쇄빙 LNG선 15척을 수주한 경험이 있고, HD현대중공업은 스웨덴 해사청과 쇄빙전용선 건조 계약을 맺은 바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한화오션 역시 관련 기술력을 착실히 쌓아가는 중입니다. 고부가가치 특수선 시장에서 한국 조선업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해운업도 분주해질 전망
배를 만드는 쪽만 바빠지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항로를 운항할 선사들도 주목받고 있는데요, HMM은 정부의 북극항로 시범 운항과 관련해 유력한 선사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 밖에 벌크·컨테이너 선대를 갖춘 종합 해운물류기업들도 새 항로가 자리 잡을 경우 수혜 가능성이 언급됩니다. 항만과 물류 인프라 업계 역시 연쇄적인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다만, 아직은 ‘가능성’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여기서 잠깐 신중한 관점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북극항로가 실제 정기 노선으로 자리 잡으려면 높은 빙해 등급을 갖춘 상선과 쇄빙선이 충분히 확보돼야 하고, 무엇보다 경제성이 입증돼야 합니다. 지금은 여름철에 한정된 시범 운항 단계에 머물러 있어, 본격적인 상업화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솔직한 평가입니다. 관련 산업이나 종목에 관심을 두더라도 이런 불확실성은 충분히 감안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도, 시작은 시작이니까
그럼에도 2030년 차세대 쇄빙연구선의 취항은 여러모로 상징적인 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극지 과학 연구의 새 장을 여는 동시에, 북극항로 개척과 조선·해운 산업의 다음 성장 동력을 확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으니까요. 두꺼운 얼음을 가르며 북극점을 향해 나아갈 한국의 쇄빙연구선,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갈 K-조선·K-해운의 이야기를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겠습니다.
생각해보면 극지 연구선 한 척을 짓는 데 5년 가까운 시간과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이 프로젝트를 단순한 ‘선박 한 척 발주’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당장 나오는 사업이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간 쌓일 극지 데이터와 항해 노하우,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산업 생태계를 함께 짓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나 미국처럼 이미 수십 척의 쇄빙선을 보유한 나라들과 비교하면 한국은 이제 겨우 두 번째 걸음을 떼는 단계이지만, 그만큼 앞으로 성장할 여지도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기후변화로 북극 해빙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북극항로에 대한 국제적 관심 자체가 커지고 있는 시점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항로가 실제로 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문이 열렸을 때 필요한 배와 기술, 운항 경험을 미리 갖춰두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격차는 생각보다 클 수 있습니다.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장’보다는 ’10년 뒤’를 준비하는 투자에 가깝습니다. 얼음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 한 척의 항적이, 앞으로 한국이 그릴 더 큰 항로의 첫 줄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